당신이 옳다

2022. 7. 4. 14:30카테고리 없음


사랑욕구


사랑, 인정에 대한 욕구 = 사랑욕구는 아기때부터 늙어서 죽기 전까지 인간이 한결같이 갈망하다 가는 것이다. 

욕구의 표현방식이 세련돼지거나 욕구 충족의 대상이 달라질 순 있어도 총량자체는 줄어들지 않는다

 

사랑욕구가 일생동안 안정적으로 공급돼야 피폐해지지않고 살 수 있다. 

몸은 음식을 동력으로 움직이듯 마음은 사랑 욕구란 동력으로 가동된다. 

사랑/인정 없인 제대로 살 수 없다. 그게 없으면 사람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사랑에 대한 욕구, 갈망에 초연하며 품위있어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은 욕망을 잘 절제하거나 욕망이 없어서가 아닌, 충분히 사랑받고 깊이 인정받은 상태의 사람이다. 

누가 배불러 죽겠는데 밥 한 공기에 쩔쩔매고 연연하겠나. 충족된 욕구는 더 이상 욕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욕구를 일생동안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려면 고도의 인간관계 능력이 필요하다. 

또다른 존재와 일상에서 공감적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 삶의 동력원 확보하는 일 

 

 

근데 더군다나 배우자일수록 공감이 힘들다.

옆 집 사람에겐 친절히 대할 수 있다. 남에겐 특별한 기대나 욕망이 없거나 덜해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에게서 받고 싶은 나의 개별적 욕구, 욕망'이 있다. 

그 욕구만큼 좌절과 결핍이 쌓일 확률이 크다. 

 

EX)친구가 그냥 밥을 사달라하면 흔쾌히 살 것이다. 그러나 내게 100만원 빚진 친구가 사달라한다면? 

내가 받을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더 빼앗기는건 억울하고 부아가 치미는 일이다. 

=이게 사람들이 자신과 밀접한 상대에게 갖는 공통적 감정이다. 

서로에게 받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이 서로 깊이 수용하고 공감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휘발유 없이 굴러갈 수 있는 차는 없기 때문에, 

우린 서로의 사랑욕구를 지겨워하지도, 비난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 채 공급하고 공급받아야 한다. 

미룰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타인을 공감한단 건 쉽지 않다. 

공감까지 가는 길의 굽이굽이, 골목마다 '나 자신'을 만나기도 하고 맞닥뜨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숙제들은 스무고개같아서 하나하나 내가 해결해가야한다. 

 

**순서는 언제나 나, -> 바깥(상대)이다. 안으로부터 퍼져가는 것이지 그 반대일 순 없다. 

성찰없이 타인의 마음을 공감할 수 없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 멈추는 순간, 타인에 대한 공감도 신호등처럼 딱 멈춘다. 자기 성찰의 부재는 공감 방해 허들이다. 

= 공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거나 낮을수도. 

 

좋은 대답과 결과가 자신을 지켜주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주목하고 공감해주는 과정 자체가 자신을 끝내 보호하는 것이다. 

 

 

안녕? 넌 누구니? 지금 이 순간이 너에겐 어떻게 느껴지니? 진심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니? 재밌니?

요즘은 바쁜 일상 중에도 이렇게 문득문득 저를 깨우는 습관이 생겼읍니다. 

누구보다 재미있어 보이는 상대를 보는 것처럼, 나를 관찰하고 내게 묻습니다. 

가치관이나 신념은 바뀌거나 타협할 수 있다. 하지만 느낌, 내 감정, 내 마음은 = 내 존제 자체라서 무조건.

무조건 주목하고 수용해야 한다. 

나를 충분히 느끼고, 격려하고 공감해야 한다. 

 

 

 


아들에게 '후회한다고하지마라'며 퇴로를 막았던 엄마

: 공감은 온몸을 갈아가며 자기 성찰을 하는 과정이겠지요. 내내 불편하게 떠오르며 저를 깨우는 그것이 제 몸을 갈아내며 성찰하는 과정이겠지요. 

그래서 난 대답했다. 아들이 좀 더 가벼워졌으면 좋겠다고요? 그럼 물어보면 됩니다. 가벼워졌냐고. 눈치볼 필요 없슴니다.

물어보는 것 자체가 치유의 손길입니다. 

 

 

 

 


경계에관하여 


나라를 예로 들어보자. 

석유자원이 풍부히 넘치는 나라도 있지만 / 풀 한포기 나기 힘든 척박한 나라도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국가처럼 각각 고유하고 개별적(성격과 기질을 가짐)이며, 전혀 다른 각각의 역사를 지닌다. 

강대국 대통령 1명이 빈곤국 국민 1000명과 대등하다고 하면 안되듯 

국가 대 국가는 일대일의 존재감을 갖는다. = 사람도 일대일의 존재감을 갖는것이 당연하다. 

 

국가 간에는 국경이 존재한다. 

국경은 그 국가의 물리적 정체성을 정의지어준다. 이 국경을 무단으로 침범할 시 = 전쟁으로 간주된다. 

= 상대국을 존중하겠단 뜻이 아니기 때문

 

이때 국경을 침범당한 나라는 어떻게 하나. 

모든 걸 동원해 맞서싸우고 막아야한다. 그렇지 못하면 유린당하며 영토, 주권을 빼앗기고 비참히 끌려당하는 역사가 시작된다. 

 

이처럼, 사람과 사이에도 국경(경계선)이 존재한다. 

물리적으론 내 피부가 나의 경게선이나, 사람 관계 사이간의 경계는 눈에 보이지 않아 지키기 어렵다. 

 

따라서 경계를 인지할 수 있어야만 내 국경을 지키고, 나아가 상대의 국경도 침범치 않을 수 있다. 

너와 나의 관계에서 어디까지가 '나'고 어디까지가 '너'인지 인식할 수 있어야, 

적합한 공감이 가능해진다. 

내가 먼저 공감받아야하는 순간인지 너를 먼저 공감해줘야 하는 순간인지 알 수 있기 때문.

= 경계를 인식해야 공감의 정확성이 높아진다.

 

 

case1) 엄마의 극구 반대에 결혼 못한 여성.

: 얼핏보면 엄마 말 듣는 효녀다. 하지만 그년 자신과 엄마 사이의 경계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영토를 침범당했는데도, 수치감이나 모멸은 커녕 칼로 날 찌르는 중인 사람에게 당신 팔은 얼마나 아프겠냐며 공감해주고 있는 꼴. 엄마에 대한 과잉과잉보호다.

자신이 '찔리고 있다는' 자각이 없는 것이다. = 결국 엄마, 자신과의 경계를 지키지 못함으로써 사랑하는 이에게도 상처를 주는 연쇄작용까지 불러왔다. 

 

자기 경계를 지키지 못하면, 자기보호도 못할뿐더러 연쇄적으로 타인의 경계까지 침범하는 가해자도 될 수 있다.

또한 이 반응은, 엄마를 '성인'이란 존재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엄마도 사람이다. 

결혼이 강행되면, 그 상황에 맞게 또 적응하고 체념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달라진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고 적응해나가기 마련이다. 적응은 인간의 본능. 

 

설령 적응치 못한다 하더라도 그건 그 사람 개인의 몫이고 능력이다. 

탐탁지 않은 엄마의 감정은 딸이 해결해줘야 할 과제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엄마 자신이 해결해야 할 '자신만의 숙제'다

 

정 힘들어한다면 도움을 줄 순 있으나 어디까지나 자신의 경계 밖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 이상은 안된다 

엄마가 힘들어하는 이유에 딸의 책임은 없다. 딸이 제대로 하지 못한 무엇 때문이 아니다. 

그 경계를 분명히 자각하고 '엄마의 몫'으로 돌려줘야, 

본인도 스스로 더 빠르게 인정하고 수습한다. 

괜히 거기에 개입했다간 '그 원인이 나 맞아'라는 이상한 확신만 주는 꼴. 나만 애꿎게 가해자 되는 꼴.

 

case2) 고혈압 아버지에게 아들이 죽었다 말 못한 남자

:당신이 아버지를 과잉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냐. 아버지를 너무 약하고 단순한 존재로 보고있는 것 아니냐. 당신은 생각 깊은 성인이고 아들 잃은 슬픔도 견뎌낼 수 있는 존재인데 반해 아버지는 부끄러움도 없고 작은 고통에도 쓰러져버리는 약한 존재인거냐. 아들이 자기 때문에 자식 잃은 고통도 삼키고 혼자 힘들어했단 사실을 알면 미안할 마음은 생각 안하냐. 

 

= 모든 인간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고 적응하는 독립적, 개별적 존재다.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갈 힘이 되어줄 수 있다. 

모두가 '경계를 인식'해야 각각 위엄있는 개별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자기보호를 잘 하는 사람이야지 타인을 도울 자격이 있다.

 

저만 공감해주는게 힘들어요. 해줘야 하나요? 

= 상처받고 힘든 사람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본질적으론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둘 다 모두 상처입은 인간이다. 

누군가에게 공감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상처도 동시에 공감받을 수 있어야 한다. 

 

자전과 공전을 동시에 하는 지구처럼, 공감은 다른 이에게 집중하는 동시 + 나도 주목받고 공감받는 행위다.

상호성 + 동시성을 잃으면 공감도 없다. 

 

온전함의 토대는 오로지 자기 보호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하며,

자기 보호는 자기 경계에 대한 민감성에서 시작된다. 

 

트라우마 현장의 자원활동가, 사회복지사 등은 큰 아픔을 겪은 피해자들에게 힘든점, 불만이 생겨도 차마 꺼내지 못하고

끙끙 앓다 사라져버린다. = 공감의 상호성/ 동시성 외면한 결과

=즉 트라우마 현장같은 극단적 고통의 현장에 있는 공감자들은 '피해자 보호보다 자기보호에 사력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자기 보호에 민감한 사람만이 끝내 타인 공감을 감당한다. 

 

상담받으러 온 자원봉사자가 미운 사람을 변호함: 그 사람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란거 알아요.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 이때 다정한 전사는:: 그 사람 변호는 나중에 해주세요. 지금은 당신이 먼저예요. 당신이 화낼 차례에요. 그래도 돼요. 그간 얼마나 많이 삼켰겠어요. 라고 단호히 말을 끊는다. 지금 앉아 있는 '그 사람의 존재'에 집중한다. 

이야기를 해보니 -> 자신에게 더 이상 이 일을 강요하면 안되겠다고 느낌.

-> 잘했어요. 당신의 진심과 헌신이 그간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조목조목 설명, + 당신이 퍼부은 몇 년의 시간들을 나도 잘 알고 있고, + 정말로 정말로 애썼다고 온 체중을 실어 말해줌. 

 

 

나도 피곤하고 심란한데, 상대방이 너무 힘들어보인다고 어어... 하면서 공감하려할 때도 있다. 

안된다. 

자기보호가 우선, 우선이다. 이는 곧 수영도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 구하겠다고 뛰어드는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위험한 사람이 1명에서 2명으로 늘어난다. 

 

공감은, '나와 너 모두에 대한 공감'의 줄임말이다. 

 

case3) 담배피는 아들을 둔 엄마 

엄마는 네가 담배피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그런데 미성년자 흡연에 대해 학교나 사회가 갖는 편견, 규율까지 어떻게 할 순 없어. 그건 엄마 영역 밖의 일이기 때문이야. 그래서 거기부턴 내가 도울 수 없네. 엄마가 네 담배를 사다주는 것도, 내 영역 밖의 일이야. 거기서부턴 네가 알아서해야되는 일이란다. 

 

상대방을 다 품고 공감할 수 있다는 말은, 

= 상대방 존재 자체와 그 존재의 마음을 그렇게 한단 뜻이다. 

마음, 존재와 행동은 별개의 항목이다. 

행동까지 공감의 대상이 될 순 없다. =영역 침범이기 때문 

ex) 나 저사람 때리고 싶어 → 응, 때리고 싶었구나. 그만큼 속상했던 거구나. 그 마음은 옳아. 이해해. 

      실제로 때림 → 이 행동을 받아들이고 이해한단 건 아니야. 이건 너의 결정이고, 결과도 너의 몫이야. 

 

관계에서의 상처는 경계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case4) 사회적 관계에서 을인데, 이 경우엔 어떡하나요

사회적 관계에선 갑과 을이 있을 순 있겠으나 심리적으로 모든 사람은 갑 대 갑이다. 

사회적 관계로만 너와 나의 관계 전체가 결정되는게 아니다라는 인식만 있어도 건강하게 경계를 지킬 수 있다. 

 

막말하는 상사 → 등산도 가고.. 친해져보려고도 노력했지만, 나아지지 않았어요. 

: 당연하다. 관계의 역동성 측면에서 보면 이 사람은 상사의 막말 행동을 오히려 강화했다. 이 사람의 기여도가 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대처법엔 나는 없고 '너'만 있는 관계로 일관했기 때문.

 

그러니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상사 앞에서 입을 다물고, 대면을 최대한 피하는 식으로 자기 존재를 지웠다. 

즉 상사에겐, 이 사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혀 존재감이 없는 흐릿한 존재다. 보이질 않는다. 

 

상사가 이 사람을 개별적 존재로 인지하지 않아도 되는 쪽으로 이 사람 스스로가 적극적인 심리적 공모자가 되어준 꼴.

 

자기 경계를 허물며 상대방의 도구로 기꺼이 전락하는 사람의 기대는 번번이 좌절된다.

당연하다. 

자신을 스스로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은 상대방의 인식 속에서도 사라진다. 

 

즉 , 여기서 해결방법은 '나의 존재'를 드러내야한다. 존재감을 보여줘야한다.

그래야 일방성이 주춤하며 제동이 걸리고, 상사가 막말을 멈춘다. 

일방적인 관계가 서서히 대칭적으로 모습을 바꾼다. 

 

존재감을 드러냈는데도 똑같으면요? 

그 관계는 내가 먼저 끊어야 옳다. 그건 곧 내게 자해와 같다. 

그 관계를 끊는 게 자기를 구하고 지키는 일이다. 

국경을 침범한게 무서워 비위를 살랑살랑 맞추고 살겠다고?

잠시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지만 길게 못보는 사람이다.평생 식민지의 국민으로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