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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심리학

미지믄 2021. 8. 16. 15:50

 

누구든 내 삶이 나와 멀어질 수록 위험해진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도 어떤 외부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인간 마음의 본질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의 삶에 마지막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외부적 환경, 상황 등 그들의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람 존재 자체다. 

 

폭력적시선) 모든 아이가 다 다르듯 노인도 당연히 다 다르다. 근데 상대적으로 노인은 노인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이 전부인 존재로 인식된다. 노인이 아닌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런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폭력이다. 누군가와 생생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기체가 아닌 '노인 일반'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무례다. 그 시선은 그 개별성을 몽땅 휘발시킨다. 

 

세월호 서명을 받던 곳에서 노인들이 욕설을 퍼붓는 일이 있었다. 소동에 관한 얘기 자체만으로는 소동에 관한 진짜 얘기를 할 수 없다. 싸우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노인이 방금 자신이 벌였던 소란을 성찰키 위해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바로 '나'에 대한 이야기. 자기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하고,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 노인이 보였던 뜻밖의 합리성은 자기 존재가 주목받은 후에 생긴 내면의 안정감에서 나와진 것이다.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도 예외 없이 변하게 하는 그 지점이 바로 '자기'다. 

사람은 자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에게 반드시 반응한다. 사람은 본래 그런 존재이다.

 

산소는 생명을 유지키 위한 절대요소이듯이, 심리적 목숨을 위해 계속 공급받아야만 하는 산소 같은 게 있다. '당신이 옳다.'는 확인이다. 이 공급이 끊기면 심리적 생명도 서서히 꺼진다. 

 

만약 집을 나와 밤거리 여기저기를 배회하며 전화를 하는 사람에게 산소공급이란, '집에 못들어가고 있구나. 무슨 일이 있었나보네.'같은 말이다. 즉 이 시간에 네가 밖을 배회하고 있다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란 이해다. 네가 이상한 아이가 아니라는 무조건적 믿음과 지지다. 그 말은 이 사람을 절대적으로 안심하게 해주고,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인으로 인해 그 다음으로 어디로 가야할 지 생각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해 우선 안심을 해야 그 다음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확인이 필요한 건 스스로도 '이 추운 날 나는 왜 거리에서 이러고 있냐'라는 본인 스스로의 추궁 또한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조차 전적으로 자기 편이 되어준다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정서적인 존재다. 본래 그런 존재임으로 우리는 일상을 지탱해 줄 최소한의 이런 외부적 산소 공급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친구들에게 전활 거는 이유는 조언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소공급을 해 줄 정서적 내 편이 필요해서이다. 

 

 

네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나는 언제든 우선적으로 상대의 마음을 존중한다. '죽고 싶다, 누굴 죽이고싶다.'란 말을 들어도 그런 마음이 들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그러니 당신 마음은 옳다고. 다른 말은 모두 그 말 이후에 해야 제대로 된 순서다. 이건 곧 사람 마음을 대하는 예의이기도 하다. 

 

'네가 옳다.'란 확인을 받기만 하면 집을 나가겠다/죽겠다/죽이겠다는 말들은 바로 아침 이슬이 되어 사라진다. 이 말 하나처럼 누군가를 강력히 변화시키는 말은 세상에 또 없다. 

 

사람에게 있어 가치관이나 성향 같은 건 사실 알고보면 내 부모나 책, 스승에게서 온 견해일수도 있지만 '감정'은 오로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요소이다. 감정은 존재의 핵심이다. 희로애락이 없는 삶이란 이미 내게서 많이 멀어진 삶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영역에서 인간은 부자건 연예인이건 서민이건 공평하게 허기지다. 

 

존재에 대한 주목: 쌀

둘러싼 것들에 대한 주목(학벌,외모,재력): 금 

=> 금이 없어도 살 순 있지만 쌀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다 가진 것 같아도 금괴더미 안에서 주린배를 움켜잡고 죽어간다. 

 

 우울증 진단에 관하여) 

드러난 증상들은 다 비슷해보여도 개인의 역사, 주변환경 같은 개별적 맥락은 다 상이하다. 하지만 우울증이라는 강력한 규정 아래로 편입되면 개별 맥락은 모두 휘발되고 우울증이라는 형해만 남는다. 우울증 환자라는 획일적 존재로 간주될 뿐이다. 우울증이 등장하며 정작 중요한 '나'는 뒤로 밀려난다. 

 

심각한 우울증이란 진단에 전문가부터 열심히 서치해 찾아간 엄마(일상의 외주화)

-> 이런 상황에서 엄마는 전문가를 찾기보다 우선 아이를 만나야 한다. 아이가 죽고싶은 마음이라 들었다. 당장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는데 왜 그 아이에게 바로 '직접' 묻지 않는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아이에게 눈을 포개고 묻는 것이다. 정확한 이해와 공감이 가장 전문가적 조치에 해당한다. 

 

또한 우울증은 특별하거나 유달리 심각한 질병이 아닌 이미 사회에 만연한 증상이다. 우린 똑같이 힘든 사회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유난떨거나 너무 심각히 생각지 말자. 따라서 전문가나 외부적 도움에 너무 기대기 보다는 기초적인 치유와 회복부터 먼저 선행하자. 기본적인 눈 마주침, 따듯한 대화와 같이 먹는 따듯한 한끼. 이런 것들이 없다면 전문적 치유는 그냥 헛일이다. 

 

우울은 삶의 보편적 바탕색)

비상상황이더라도 내용을 잘 알아서 일상 속에서 관리 가능한 것으로 끌어들이면 내 일상을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고도 대처가 가능하고, 오히려 그게 더 안전할 수 있다. 

갈등과 상처는 일상적 허기처럼 찾아오는데 그것을 내 손으로 해결하는 최소한의 방법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삶의 고통은 정신과 의사와 상의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죽고 싶다는 마음을 비쳤는데도
그 고통이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외면되지 않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누가 힘들어보일 때 그에 대해 자세히 묻는 것은 실례가 아닐까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가장 절박히 원하는 것은 바로
내 마음과 내 상황에 깊이 주목하고 진심으로 물어봐주는 것이다. 
이 때 치유는 이미 시작된다. 

 

무엇을 묻느냐 보다 내게 집중하고 내 마음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 치유 

이 행위만으로 그 사람을 해선 안되는 행동들로부터 적극 지켜 줄 수 있다. 

 

현대 정신의학은 사회 구조적인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 개인의 심리적 문제들을 여러 연구와 실험을 동원해 생물학적 원인으로 돌려놓는 일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인간이라는 한 우주의 광활한 내면을 세로토닌 등 몇 가지 신경 전달 물질을 앞세워 지나치게 단순화하기도 했다. 

두리 아빠의 고통이 산후 우울증이 아니라면 어떤 병명을 붙여야 하는 걸까. 나는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두리 아빠의 우울은 병이 아니고, 그냥 우리 삶의 한 조각일 뿐이다. 

 

감정은 내 삶이나 존재의 내면을 알려주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춥기도 했다 덥기도 했다 갑자기 비가 들이쳤다 해가 난다고 하더라도 이 변화 모두 대기와 지구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들쑥날쑥한 감정도 병이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몸이 알아서 대응하는 현상인 것이다. 

ex) 대기업에서 은퇴한 남자는 퇴직 후 무력감과 피해의식으로 괴로워한다. 이를 두고 '은퇴 후 우울증으로 고생한다.'고 해야할까.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과제일까? 아니다. 극복할 게 아니라 순하게 수용해야 할 삶의 중요한 감정이다. 은퇴 후 저런 감정과 단계가 없다면, 되려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한 번은 직면해서 받아들여야 할 삶의 과제를 무조건 바쁘게 살거나 한다는 식으로 뒤로 미루다보면 이자까지 붙은 대가를 치르게 된다. 퇴직 후 우울은 반드시 필요한 감정반응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 신호다. 그 감정은 반드시 다른 깨달음의 도움닫기가 된다. 

 

죄의식, 무력감. 단어만 놓고보면 나를 좀먹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정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가장 도움이 됐던 것은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이 감정들이 형성해낸 치유적 공기의 수호천사같은 울타리였다. 죄의식과 무력감의 연대가 해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감정들은 삶의 나침반이다. 약으로 함부로 대해 없앨만큼 하찮은 것이 아니다. 꼭 필요할 때 우울이 찾아온다. 감정은 내 존재의 핵이다. 

 

우울이란 내 삶의 파도에 리듬을 맞춰 

 

생존의 최소조건: 내게 주목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함

 

생각 vs 감정? 

: 감정이 항상 옳다. 나라는 존재의 핵심이 위치한 곳은 내 감정, 느낌이다. 나의 안녕에 대한 판단은 거기에 준해서 할 때 정확하다. 

 

취향, 기호, 가치관, 신념 등은 사실 나 처럼 보이지만 나 자체는 아니다. 

또 '전형적 둘째 콤플렉스 때문에..' 같이 심리 관련 용어, 상담가로부터 들었던 것 등 자기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자기 얘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아니다. 그건 내 상처와 상황에 대한 누군가의 견해지 내 상처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상처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박제되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내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살아있다. 빛깔, 파동, 굴곡은 늘 달라지는 것이다. 

>> 상처 또한.

'나는 사실 어릴 때 부터 맞고 자랐어.'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 때 느꼈던 무력감이나 수치심, 그런 감정들을 떠올려 얘기하는 것이 존재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상처의 '내용'보다 그 상처에 대한 '내 태도와 느낌'이 존재의 이야기다. 이게 진정한 자기존재를 만나가는 과정이다. 

 

충조평판은 배제하고. 

누군가 고통이나 상처를 얘기할 때 이는 독약이다. 충조평판은 고통에 빠진 사람의 상황에서 '고통'을 소거하고 상황만 인식할 때 나올 수 밖에 없으니까. 고통 속 상황을 말하는 건데 고통을 소거하면 그 상황에 대한 팩트 대부분은 유실된다. 

 

>>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해야해?

결론적으로 해줄 말은 별로 필요없다. '내'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말이 중요한 거다. 무슨 말을 해야하지 고민하지마라. 눈길, 숨결로 그 사람을 껴안는다고 생각하면서 진심으로 잘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의 존재, 고통에 눈을 포개고 그의 말이 꺼내나와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뭔가 해줘야 한다는 조바심은 버리고 그냥 마음이 어떻고 무슨 상태인지 물어봐줘야 한다. 

'지금 네 마음은 어떤거야?', '네 고통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거니?'

 

>>대답이 없다면?

괜찮다. 그냥 자기 존재에 주목하고 그런 질문을 해주는 사람의 존재를 그가 '확인'했다는 것이 포인트다. 자신의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치유의 '결정적 요인'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자 한 세상이다. 
누구든 결정적인 치유자가 될 수 있다. 
사람을 구하는 힘의 근원은 '정확한 공감'이다.

 

심리적 CPR이란? 

:그의 '나'가 위치한 그 곳을 정확히 찾아낸 뒤 거기에 장대비처럼 제대로 된 공감을 퍼붓는 일. 

 

 

3장

공감은 압도적 효과를 가지고 있음에도 부작용까지 없으니 비교가 무의미하다. 절대적 치료제인 공감이라는 심리적 무기를 가질 수 있다면 사람 관계에서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대폭 줄일 수 있어 사는 일이 홀가분해진다. 

 

항우울제 등의 약물: 목말라 고통받는 사람의 동네 어귀에 살수차가 와서 대량의 물 몇 톤을 쏟아놓고 가는 것

공감: 목이 타는 그 사람에게 나뭇잎 띄운 시원한 물 한잔을 정확히 건네는 일 

 

공감에 대한 클리셰)
무조건 한결같이 끄덕이며 긍정해 주는 것, 잘 들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X. 

그건 감정노동이다. 공감이 아니다. 질끈 버티고 말자. 하고는 겉으론 잘 들어줘도 집 가면 다신 안만나야지 생각이 들 것이다. 나 또한 감정의 동물이라 에너지가 정해져있는데 그런 소모는 좋지 않다. 자칫하면 거기에 압도돼 내가 먼저 쓰러질 수도 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유쾌하지 않은 경험일 수 있다. 두 사람 다 유쾌하려면, 진정한 공감이 필요하다. 

 

EX)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 화가 난 A씨. 

왜였을까? 이야기를 듣다 '친구에게 쏟는 정성이 참 특별한 것 같다.'는 내 느낌에 그의 감정이 열렸다. 

실은 그도 비슷한 경험을 최근 했었기에 답답해서였다. 친구의 고통에 공감하려 애쓰다 예전의 자기자신과 대면한 것이다. 그 '자신'에 주목하며 눈물을 흘리고 나니 홀가분해졌다. 먼저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던 '내'가 있었다. 

그 후로는 친구만의 속도가 따로 있겠거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공감은 이렇게 상대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자기의 깊은 감정또한 함께 자극되는 일이다. 예기치 않게 지난 나의 상처를 마주하는 기회를 만나는 과정이다. 그래서 A씨처럼 힘든 상황이오면 상대에게 공감하는 일보다 먼저 '내게' 물어야 한다. 따스하게 너는 지금 왜 불쾌함을 느끼냐고, 왜 싫으냐고. 언제나 나를 놓쳐선 안된다. 내가 언제나 먼저이다. 

이게 공감의 필요충분요소다. 의무적으로 한다 한들 진정한 효과는 절대 일어날 수 없다. 

 

즉: 상대에게 공감만 해주려 맘이 앞서다 '나'의 감정은 누르면서 감정노동이 되는 것인데, 이건 진정한 공감이 아니고 이 방식으론 상대를 끝까지 효과있게 부축해낼 수 없다. 감정적 반응 자체는 공감이 아니다. 둘 다 시간만 버린다. 진정한 공감은 후에 둘 다 전보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져야 한다. 감정노동 =/ 공감

 

 

그럼 진짜 공감은? 

자세히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자연스럽게 공감까지 할 수 있다. 

한 존재가 또 다른 존재가 처한 상황, 상처에 대해 알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며 그 존재 자체에 대해 갖게 되는 통합적 정서와 사려 깊은 이해의 어울림이 공감이다. 그러므로 타고나는 게 아닌 학습이 필요한 영역이다. 

 

공감은 정서적 공감, 인지적 공감으로 나뉜다. (2:8)

흔히 얘기를 들으면 눈물만 뚝뚝흘리고 어머어머 어떡해...하는 사람들이 공감 잘한다.라 생각하지만 XXX

= 정서적 호들갑이다. 

악의가 없어도 얼마든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래서 더 공감을 배워야 한다. 세상에는 배워야 아는 고통과 공감할 수 있는 고통이 정말 많다. 내가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공감은 다정한 시선으로 사람 마음을 구석구석, 찬찬히, 환하게 볼 수 있을 때 닿을 수 있는 어떤 상태이다. 그래서 타고나는 성품이 아니라 내 걸음으로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얻게 되는 무엇이다.